항목 ID | GC06501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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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猫巖-鼠洞 |
이칭/별칭 | 「쥐바위가 있는 서송과 괘바위가 있는 묘암의 유래」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철목리|지성리 |
집필자 | 김선아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2년 - 「묘암과 서동」, 『내 고장 전설집』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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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9년 - 「쥐바위가 있는 서송과 괘바위가 있는 묘암의 유래」, 『증편 한국 구비 문학 대계』-전라북도 무주군편에 수록 |
관련 지명 | 묘암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철목리 |
관련 지명 | 서동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지성리 |
관련 지명 | 서수골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지성리 |
관련 지명 | 남대천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
관련 지명 | 대덕산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증산리 |
관련 지명 | 율평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지성리 |
관련 지명 | 범바위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지성리 |
관련 지명 | 오동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지성리 |
채록지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지성리 부등 마을 |
성격 | 설화|풍수지리담 |
주요 등장 인물 | 묘암 마을 사람들|서동 마을 사람들 |
모티프 유형 | 풍수지리의 영향을 받은 두 마을 |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철목리와 지성리에서 묘암 마을 및 서동 마을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묘암과 서동」은 고양이의 형상을 한 바위가 있어 ‘묘암(猫巖)’이라고 불린 마을과, 마을의 형상이 쥐처럼 생겼다 하여 ‘서동(鼠洞)’이라고 불린 두 마을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풍수지리담이다. 이를 「쥐바위가 있는 서송과 괘바위가 있는 묘암의 유래」라고도 한다.
[채록/수집 상황]
「묘암과 서동」은 1992년 김경석이 편찬하고 무주군에서 간행한 『내 고장 전설집』의 164~168쪽에 수록되어 있다. 채록 장소와 채록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또한 2013년 김익두·김월덕·허정주·백은철 등이 집필하고 한국학 중앙 연구원에서 발행한 『증편 한국 구비 문학 대계』-전라북도 무주군에 「쥐바위가 있는 서송과 괘바위가 있는 묘암의 유래」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는 2009년 무주군 무풍면 지성리 부동 마을 회관에서 주민 서정덕으로부터 채록한 것이다. 여기에 채록된 「쥐바위가 있는 서송과 괘바위가 있는 묘암의 유래」는 한국 구비 문학 대계(http://gubi.aks.ac.kr/web/TitleList.asp)에서 디지털 음원으로 들을 수 있다.
[내용]
아득한 옛날 대덕산에 뿌리를 두고 흐르는 남대천을 사이에 둔 두 마을이 있었다. 남대천 서쪽에 있는 마을은 뒷산에 고양이 형상을 한 바위가 있어서 ‘묘암’이라 불렀고, 동쪽에 있는 마을은 쥐처럼 생겼다고 하여 ‘서동’ 또는 ‘서수골’이라고 불렀다.
묘암 마을 사람들은 학문을 중시하여 가난한 사람이 많았고, 서동 마을은 먹을 것을 중시하여 열심히 농사를 지어 모두가 넉넉하게 살았다. 묘암 마을 사람들은 서동 마을 사람들을 밥서동이라고 부르며 비아냥댔고, 서동 마을 사람들은 묘암 마을 사람들을 글두더지라고 불렀다. 서동 마을 사람들은 묘암 마을 사람들이 글공부를 하느라 가난하게 지내는데도 번듯한 벼슬을 한 사람이 없어 더욱 비웃었다. 두 마을은 다투는 일은 없었지만 서로 업신여겨 가까이 하지 않고 서로 마주 보며 다르게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해 가뭄이 들어 가난한 묘암 마을 사람들은 더욱 가난하고 비참하게 지냈지만 서동 마을 사람들은 그동안 비축해 놓은 식량으로 걱정 없이 지냈다. 이런 상황에서도 묘암 마을 사람들은 책에만 매달렸고, 서동 마을 사람들은 원래 고약한 심성이 아니었는데도 묘암 마을 사람들을 도와줄 생각을 안 했다. 이듬해에도 가뭄이 심하게 들어 온 나라가 굶주리게 되었고 도적들이 들끓었다. 묘암 마을 사람들은 굶어 죽기도 하고 병들기도 했지만 서동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큰 어려움 없이 지냈다. 묘암 마을의 사내 하나가 울화가 치밀어 서동 마을에 식량이 많다고 소문을 냈고, 이웃 마을 사람들과 도적떼가 서동 마을을 약탈해 마을은 쑥대밭이 됐지만 서동 마을 사람들은 마을 뒷산 땅굴에 비축해 둔 식량으로 여유 있게 위기를 넘겼다. 묘암 마을 사람들은 그 겨울에는 초근목피로, 다시 봄이 되자 새순으로 허기를 달랬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꺼번에 비가 쏟아져 남대천이 범람하고 산사태에 바위들이 마을까지 굴러내렸다. 다행히 때맞춰 비가 내려줘서 농사가 풍년을 이뤄 다시 평화로운 시절이 돌아왔다. 묘암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글을 읽고, 서동 마을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묘암 마을에 사는 젊은 부부의 아이가 사라졌고, 그 후 어린아이들이 며칠 간격으로 하나씩 사라졌다. 아이를 잃을까 두려워진 사람들은 묘암 마을을 떠났다.
묘암 마을의 노인들이 마을의 장래를 걱정하며 모여 앉아 있는데, 어느 날 한 나그네가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나그네는 묘암 마을의 앞산과 뒷산을 보더니 노인들에게 곧 이 마을에 큰 재변이 생길 것이니 어린아이들을 호랑이 밥으로 주고 싶지 않으면 범바위를 없애고 산 중턱의 까마귀 떼들도 조심하라고 했다. 산속에 묻혀 있던 범바위가 봄에 내린 큰 비로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마을에 어린아이가 없어지는 변괴가 생긴 것이었다. 묘암 마을의 장정들은 바로 범바위를 없앴고, 그 후로는 어린아이들이 사라지는 일이 없어지고 평화가 찾아왔다. 이때부터 대덕산 율평 마을 뒷산에서 묘암 마을 사람들이 부숴버렸다는 바위를 ‘범바위’라 불렀고, 까마귀 떼가 날던 곳을 ‘까마귀디미’라고 부르다가 오늘날 ‘오동(烏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서동 마을과 묘암 마을 사이에 다리가 놓이게 되었다. 다리가 놓인 후 서동 마을에는 액운이 끊이지 않고 가세가 기울어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었다. 반면에 묘암 마을에서는 객지로 떠났던 많은 사람들이 돈을 모아 금의환향했다. 새로 다리가 놓여 고양이가 쥐를 마음대로 잡아먹을 수 있는 형세로 변해 서동 마을이 망하고 묘암 마을이 흥한 것이라고 했다. 이에 서동 마을 사람들은 농사를 잘 짓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쥐서(鼠)’를 ‘호미서(鋤)’로 바꿔 쓰게 되었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묘암과 서동」의 주요 모티프는 ‘풍수지리의 영향을 받은 두 마을’이다. 「묘암과 서동」은 고양이와 쥐의 형상이라는 대립적인 지세로 자리 잡은 두 마을의 흥망성쇠는 늘 대립적으로 전개된다. 극심한 가뭄이 들어 무주군 무풍면 철목리 묘암 마을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릴 때, 무주군 무풍면 지성리 서동 마을 사람들은 부족함 없이 지내면서도 도와주지 않았다. 무주군 무풍면 철목리 묘암 마을에 사는 한 사내는 무주군 무풍면 지성리 서동 마을에 식량이 많다는 소문을 내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무주군 무풍면 지성리 서동 마을 사람들은 무주군 무풍면 철목리 묘암 마을에 직접적인 해를 가하지 않고 성실하게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도 남대천에 다리가 놓이자 고양이가 쥐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지형이 되어 망하게 된다. 즉 「묘암과 서동」은 풍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이야기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