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11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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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德裕山-傳說 |
이칭/별칭 | 「덕유산 산신령의 계시를 받은 이성계」,「광여산에서 덕유산으로 이름이 바뀐 유래」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영미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2년 - 「덕유산의 전설」, 『내고장 전설집』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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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2009년 1월 30일 - 「덕유산 산신령의 계시를 받은 이성계」 채록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2009년 1월 30일 - 「광여산에서 덕유산으로 이름이 바뀐 유래」 채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9년 - 「덕유산의 전설」, 『증편 한국 구비 문학 대계』-전라북도 무주군에 수록 |
관련 지명 | 덕유산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
채록지 | 배방 마을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심곡리 배방 마을 |
채록지 | 삼공 마을 회관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 삼공 마을 |
성격 | 설화|산악 유래 전설|지명 유래 전설 |
주요 등장 인물 | 이성계 |
모티프 유형 | 산명 및 지명 유래|피난 |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에서 덕유산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덕유산의 전설」은 조선 시대부터 내려오는 ‘덕유산’이라는 명칭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이성계(李成桂)[1335~1408]가 지낸 산신제, 제단, 동비날 등 신비스러움과 관련된 일화를 소개한 일종의 산악 유래 및 지명 유래 전설이다. 이를 「덕유산 산신령의 계시를 받은 이성계」, 「광여산에서 덕유산으로 이름이 바뀐 유래」 등이라고도 한다.
[채록/수집 상황]
「덕유산의 전설」은 1992년 김경석이 편찬하고 무주군에서 간행한 『내 고장 전설집』의 58쪽에 수록되어 있다. 정확한 채록 시기는 미상이다. 또한 2013년 김익두·김월덕·허정주·백은철 등이 집필하고 한국학 중앙 연구원에서 발행한 『증편 한국 구비 문학 대계』-전라북도 무주군에 「덕유산 산신령의 계시를 받은 이성계」, 「광여산에서 덕유산으로 이름이 바뀐 유래」 등의 제목으로 실려 있어 「덕유산의 전설」의 내용을 보충해 주고 있다. 「덕유산 산신령의 계시를 받은 이성계」는 2009년 1월 30일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심곡리 배방 마을의 주민 김수환으로부터, 「광여산에서 덕유산으로 이름이 바뀐 유래」는 2009년 1월 30일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 삼공 마을 회관에서 주민 이병상으로부터 각각 채록한 것이다.
[내용]
예로부터 덕유산은 많은 선비와 도학자들이 모여 도를 닦고 공부를 했던 명산으로, 원래 이름은 광여산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신해 왔는데 신기하게도 왜병들이 지나갈 때는 짙은 안개가 드리워져 산속의 숨은 사람들을 가려 주었다. 사람들은 광여산의 신비로움에 감탄하여 덕이 있는 산이라는 의미로 ‘덕유산(德裕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신비로운 산 정상에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전국의 명산을 찾아 산신제를 지내고 태자를 낳아서 ‘덕유산’이라고 했다는 전설도 덧붙여 있다. 산신제를 지내기 위해 쌓은 제단이 남아 있으며, 이 제단을 쌓을 때 쇠로 만든 말[馬]과 비를 함께 세워 ‘동비날[銅碑峴]’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또한 이성계가 머물며 밥을 지어 먹었던 골짜기를 ‘밥진골’이라 한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덕유산의 전설」의 주요 모티프는 ‘산명 및 지명 유래’, ‘피난’ 등이다. 특히 「덕유산의 전설」은 왜병으로부터 피난민을 보호해 주었던 피난 모티프를 중심으로 신비스러운 산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성계가 덕유산 상봉에 제단을 쌓고 산신제를 지낸 일화를 덧붙임으로써 신비스러운 영산의 이미지를 배가시킨다. 또한 덕유산을 이성계의 발자취와 관련지음으로써 조선 건국에 일조한 지역의 역할을 부각시키고, 조선 건국에 대한 지역민들의 은근한 동조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