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06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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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以謙 |
영어공식명칭 | Bak Igyeom |
이칭/별칭 | 덕후(德厚),삼암(三巖),의재(毅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기곡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유호석 |
출생 시기/일시 | 1553년 - 박이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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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613년 - 박이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89년 - 박이겸 압계 서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812년 - 박이겸 대사헌 증직, 정려 명정 |
수학|강학지 | 읍청당 -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
사당|배향지 | 박이겸 정려각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기곡리 |
사당|배향지 | 압계 서원 -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학선리 |
성격 | 유학자|효자 |
성별 | 남 |
본관 | 밀양 |
대표 관직|경력 | 정릉 참봉 |
[정의]
조선 후기 무주군 설천면 기곡리에 정려각이 세워진 유학자이자 효자.
[개설]
박이겸(朴以謙)[1553~1613]은 선조(宣祖) 대의 학자로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문인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으며, 임진왜란의 와중에 상을 당하자 여묘를 살면서도 나랏일을 걱정하였다. 뒤에 유일(遺逸)로 정릉 참봉(貞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가계]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후(德厚), 호는 삼암(三巖) 또는 의재(毅齋). 아버지는 국당(菊堂) 박흥생(朴興生)의 후손인 증이조 참의(贈吏曹參議) 박충현(朴忠賢)이다.
[활동 사항]
박이겸은 1584년(선조 17) 충청도 영산(永山) 고당(高塘)[현재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에 있는 읍청당(浥淸堂)에서 덕구(德久) 박이항(朴以恒) 등 12명의 벗과 함께 백록동규(白鹿洞規)와 남전 향약(藍田鄕約)을 본따서 덕업계(德業契)를 만들어 학문을 익히고 도의를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당시 그들이 맺은 덕업계에 관한 이야기는 민욱(閔昱)의 『석계집(石溪集)』에 있는 「고당 덕업계서(高塘德業契序)」에 자세하게 나온다. 박이겸 외에 당시 덕업계에 참여한 12명의 계원은 이대유(李大(由+己))[자는 경인(景引), 호는 활계(活溪)로 경자생], 김대호(金大好)[자는 선보(善甫), 호는 충암(忠巖)으로 신축생], 정곡(鄭谷)[자는 양승(養勝), 호는 고강(高江)으로 임인생], 박정필(朴廷弼)[자는 여익(汝翼), 호는 풍뢰당(風雷堂)으로 경술생], 박정로(朴廷老)[자는 여헌(汝獻), 호는 영모재(永慕齋) 또는 뇌학재(懶學齋)로 계축생], 우흥룡(禹興龍)[자는 운길(雲吉), 호는 난고(蘭臯)로 을묘생], 박이항(朴以恒)[자는 덕구(德久), 호는 비암(秘巖)으로 을묘생], 박정량(朴廷亮)[자는 명윤(明允), 호는 심천(深川)으로 무오생], 민욱(閔昱)[자는 경엽(景曄), 호는 석계(石溪)로 기미생], 전택(全澤)[자는 덕윤(德潤), 호는 화암(花巖)으로 임술생], 전설(全渫)[자는 시응(時應), 호는 고산(孤山)으로 계해생], 최응신(崔應信)[자는 덕기(德基), 호는 용암(龍巖)으로 계해생]이다.
[학문과 저술]
박이겸은 읍청(揖淸) 박사종(朴嗣宗)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일찍이 중봉 조헌, 한강(寒岡) 정구(鄭逑) 등과 더불어 학문을 토론하였다. 『선천 심학도(先天心學圖)』를 짓는 등 저술 활동에도 힘을 기울였으며, 4대조인 박흥생(朴興生)의 유문을 삼암 서사(三巖書舍)에 보관하여 뒷날 『국당 유고(菊堂遺稿)』가 간행되는 데 산파 역할을 하였다.
[상훈과 추모]
1789년(정조 13) 국헌(菊軒) 임옥산(林玉山)과 함께 전라북도 장수의 압계 서원(鴨溪書院)에 배향되었다. 1812년(순조 12) 감사(監司)의 추천으로 대사헌에 증직되고 정려를 받았다. 무주군 설천면 기곡리에 정려각(旌閭閣)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