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8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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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堉 |
이칭/별칭 | 백후(伯厚,잠곡(潛谷),회정당(晦靜堂),문정(文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인호 |
[정의]
청풍 봉강서원에 배향된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회정당(晦靜堂). 증조할아버지는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이자 대사성을 역임한 김식(金湜)이고, 할아버지는 군자감 판관 김비(金棐), 아버지는 참봉 김흥우(金興宇)이며, 어머니는 현감 조희맹(趙希孟)의 딸이다. 아들로 김좌명(金佐明)이 있다.
[활동 사항]
김육(金堉)[1580~1658]은 1605년(선조 38) 사마시에 입격한 뒤 성균관에 들어갔다. 1609년(광해군 1) 동료 태학생들과 함께 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 다섯 사람을 문묘에 향사할 것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린 일이 화근이 되어 문과에 응시할 자격이 박탈되자, 성균관을 떠나 경기도 가평 잠곡 청덕동에 은거하였다. 청덕동에 머물며 회정당을 짓고 홀로 학문을 닦으면서 호를 잠곡이라 지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2월 음성 현감이 되어 목민(牧民)의 직분을 다하는 한편,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해 10월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으며, 1633년(인조 11) 9월 안변 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로 나가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는 직임을 맡았다. 이어 동지성절천추진하사(冬至聖節千秋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예조 참의·승정원 우부승지·장례원 판결사를 거쳐 1638년(인조 16) 6월 충청도 관찰사에 올랐다.
도정(道政)에 임하여 대동법의 시행을 건의하는 한편, 수차(水車)[무자위·물레방아]를 만들어 보급하였으며, 이후 승정원 좌부승지와 형조 참의 겸 성균관 대사성·홍문관 부제학·사간원 대사간·병조 참의·한성부 우윤·도승지 겸 원손보양관·병조 참판·이조 참판 겸 비변사 유사제조·형조 판서 겸 선혜청 제조·의정부 우참찬·사헌부 대사헌·예조 판서·도총부 도총관·개성부 유수 등을 지내면서 1643년과 1645년 두 차례 중국에 다녀왔다.
1649년 5월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사헌부 대사헌이 되고, 이어 9월에 우의정이 되자 대동법을 전국에 시행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대동법의 시행을 반대하는 김집(金集)과 불화를 빚으며 이듬해 1월 중추부 영사(中樞府領事)로 물러앉아 다시 진향사(進香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71세의 몸으로 중국에 다녀온 뒤, 잠시 향리에 머무르다가 이듬해 1월 영의정에 임명되고, 겸하여 실록청 총재관(實錄廳摠裁官)을 맡아 『인조실록(仁祖實錄)』을 편찬하였다.
대동법 시행 지역을 확장하기 위하여 또다시 힘을 기울여 충청도에 시행하는 데 성공하였고, 아울러 민간에 주전(鑄錢)을 허용하는 데도 성공하였다. 그리고 12월 원임(原任) 정태화(鄭太和)가 영의정에 복귀함에 따라 좌의정으로 물러앉아 지내면서 대동법 시행에 따른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인조실록』을 완성하였다. 1654년(효종 5) 6월 다시 영의정에 오르자 대동법의 시행 지역을 확대하고자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을 구상하고, 이를 1657년(효종 8) 7월 효종에게 바치면서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 건의에 대한 찬반의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세상을 떠나 대동법 확대 시행은 그의 유언에 따라 서필원(徐必遠)에 의하여 뒷날 성취되었다. 김육은 저술을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몸소 활자를 제작하고 인쇄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자손 대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가업(家業)으로 계승되어 우리나라 주자(鑄字)와 인쇄 사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술로는 시문을 모은 11권 10책 『잠곡유고(潛谷遺稿)』, 『잠곡별고(潛谷別稿)』, 『잠곡유고보유(潛谷遺稿補遺)』, 『잠곡속고(潛谷續稿)』를 비롯하여 『천성일록(天聖日錄)』, 『청풍세고(淸風世稿)』, 『조천일기(朝天日記)』, 『기묘록(己卯錄)』, 『잠곡필담(潛谷筆談)』, 『당삼대가시집(唐三大家詩集)』, 『유원총보(類苑叢寶)』, 『황명기략(皇明紀略), 『종덕신편(種德新編), 『송도지(松都誌)』,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등이 전한다. 그리고 「자네집에 술닉거든」이라는 시조 1수가 있다.
이 중에서 『유원총보』는 우리나라의 학문적 역량을 키우기 위하여 편찬된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주목된다. 그리고 『구황촬요(救荒撮要)』·『벽온방(辟瘟方)』·『종덕신편』 등은 목민자(牧民者)의 각성을 촉구하는 안민(安民)의 한 방책으로 김육의 위민적(爲民的) 생애의 면모를 보이는 저술이라 할 수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 소쿠리마을 청풍 김씨 문의공파(文毅公派) 묘역에 있으며, 1986년 남양주시 향토 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마을의 대로변에는 1664년(현종 5) 세운 신도비가 있으며, 비문은 이경석(李景奭)이 짓고 아들 김좌명이 썼다.
[상훈과 추모]
청풍 봉강서원(鳳崗書院)을 비롯하여 양근(楊根) 미원서원(迷源書院), 강동(江東) 계몽서원(啓蒙書院),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등에 배향되었으며, 1704년(숙종 30)에는 가평의 선비들이 건립한 잠곡서원(潛谷書院)에 독향(獨享)되었다. 봉강서원은 1671년(현종 12) 건립되고 1672년 사액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1871년(고종 8) 훼철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