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8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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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渭聘 |
영어음역 | Gang Wibing |
이칭/별칭 | 백상(伯尙),서호(西湖),충렬(忠烈)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양식 |
[정의]
조선 후기 청풍 군수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백상(伯尙), 호는 서호(西湖). 아버지는 의금부 도사를 지낸 강응생(姜應生)이다.
[활동 사항]
강위빙(姜渭聘)[1569~1637]은 1603년(선조 36)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가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희릉 참봉(禧陵參奉), 종묘서 봉사(宗廟署奉事), 순안 현령(順安縣令)을 지냈다. 그러나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물러나 있다가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다시 관직에 나아갔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세자익위사 익찬(翊贊)·사어(司禦), 청풍 군수를 역임하였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사어로서 강화도로 들어가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麟坪大君) 등을 호위하였다. 그러나 1637년(인조 15) 강화성이 함락되면서 포로가 된 뒤 항복을 강요받았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순절하였다. 이때 적을 앞에 두고 “내 목은 끊을 수 있으나 너희들 앞에 무릎은 꿇을 수 없다”라며 저항하였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혜민서(惠民署)의 연혁·분장(分掌)·사례 등을 정리 수록한 『혜국지(惠局志)』가 있다.
[상훈과 추모]
1657년(효종 8) 승정원 좌승지, 1811년(순조 11) 다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강화도에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졌으며, 충렬사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