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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770
한자 惟政
이칭/별칭 이환(離幻),사명당(泗溟堂),송운(松雲),종봉(鍾峯),임응규(任應奎),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분야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제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가|서품 시기/일시 1544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589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593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594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602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604년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1610년연표보기
성격 승려
성별
대표 경력 왕사

[정의]

조선 후기의 제천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

[개설]

유정은 본관이 풍천(豊川)이고,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泗溟堂)·송운(松雲)·종봉(鍾峯)이다. 속명은 임응규(任應奎)이다. 아버지는 형조 판서에 추증된 임수성(任守城)이며, 어머니는 달성 서씨(達城徐氏)이다.

유정(惟政)[1544~1610]과 관련한 몇 가지 유물이 전하는데,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450-2호 「사명당 영정(泗溟堂影幀)」은 사명당 유정의 영정으로 좌안7분면(左顔七分面)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이다. 크기는 가로 81.2㎝, 세로 124㎝이며 세 폭의 비단으로 이어져 있다. 화면 상단 향좌측(向左側)에는 주지백서(朱紙白書)의 ‘대광보국숭록대부홍제존자사명당대선사지진(大匡輔國崇祿大夫弘濟尊者泗溟堂大禪師之眞)’이라는 화제(畵題)와 풍원군 조현명[1690~1752]의 영찬(影讚)이 있다.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15호 표충비(表忠碑)는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에 위치하며, 일명 ‘사명대사비’라고도 부른다. 1742년(영조 18) 사명당 유정의 5대 법손(法孫) 남붕(南鵬)이 건립한 것으로 높이 4m, 너비 1m, 두께 0.55m이다. 사명당의 행장(行狀)과 밀양 표충사에 대한 내력, 기허(驥虛) 대사의 비명이 기록되어 있다. 영중추부사이었던 도곡(陶谷) 이의현(李宜顯)이 글을 짓고, 퇴어(退漁) 김진상(金鎭商)이 글씨를 썼으며, 영의정을 지낸 지수재(知守齋) 유척기(兪拓基)가 전액(篆額)을 썼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116호 사명대사 생가지(四溟大師生家址)는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399번지를 생가 터로 추정하고 기념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이 지역 일원의 지표 조사 결과, 기와 및 생활용품 조각 등과 건축물, 담장이 있던 흔적이 확인되었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2호 갑사 표충원(甲寺表忠院)은 420년(구이신왕 즉위년) 아도 화상이 처음 지은 것으로 알려진 갑사에 위치한 조선 시대의 사당이다. 1738년(영조 14)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격퇴한 서산 대사 휴정·사명 대사 유정·기허당 영규 대사 등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그리고 충청북도 유형 문화재 제132호 제천 신륵사 극락전(堤川神勒寺極樂殿)이 있다. 신륵사는 582년(진평왕 4) 아도 화상이 지었다고 전한다. 이후 문무왕[재위 661∼681] 때 원효가 고쳤다고 하며, 선조사명 대사가 다시 지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극락전의 외벽에 임진왜란 당시 사명 대사 유정의 활약상을 그린 「사명대사행일본지도(泗溟大師行日本之圖)」가 그려져 있다.

「사명대사행일본지도」는 신륵사 극락전 우측 상단 벽면에 가로 17.4m, 세로 8m의 규모인데, 임진왜란 당시 강화 정사로 일본에 상륙한 대사 일행을 일본인들이 수행하는 행렬을 묘사하고 있다. 벽화에는 10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며 사명 대사가 가마를 타고 있으며 일본인들이 호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특히 일본군이 무릎을 꿇은 채 무장해제를 한 모습은 매우 독특해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가늠하게 하는 사료 가치가 매우 높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활동 사항]

1558년(명종 13)에는 어머니가, 1559년(명종 14)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 3년 뒤 승과(僧科)에 합격하였고, 많은 유생들과 교유하면서 특히 당시 재상이던 노수신(盧守愼)에게 『노자(老子)』·『장자(莊子)』 등을 배웠다.

이후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선조 8) 선종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선종 수사찰(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휴정 서산 대사를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하였다. 신륵사의 중건과 관련한 직접적인 자료는 전하지 않으나, 명종 대에 해당하는 1545∼1567년 신륵사에 머물면서 중건 불사를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역모 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되었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모집하여 휴정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듬해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이 되어 명나라 군사와 협력, 평양을 되찾고 도원수 권율(權慄)과 의령(宜寧)에서 왜군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워 당상관의 위계를 받았다. 1594년(선조 27)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의논하여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진중을 세 차례 방문하여 화의 담판을 하였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의 도산(島山)과 순천 예교(曳橋)에서 전공을 세우고 1602년(선조 35) 중추부 동지사(中樞府同知使)가 되었다. 또한 1604년(선조 37)에는 국왕의 친서를 갖고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강화를 맺어 이듬해 전란 때 잡혀 간 조선인 3,0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선조가 승하한 뒤 해인사에 머물다가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사상과 저술]

저서에 『사명당대사집(泗溟堂大師集)』,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등이 있다. 『사명당대사집』은 7권 1책으로 1612년(광해군 4) 제자 혜구(惠球) 등이 유정의 유문을 처음 수집·간행한 후 1652년(효종 3) 공봉산인(公峰山人) 성일(性一) 등이 간행하였다. 시(詩), 문(文) 등 10여 편이 수록되어 있다.

『분충서난록』은 2권 1책으로 유정의 일기와 상소문(上疏文), 기타 사적이 수록되어 있다. 이의현의 「표충사송운영당비명(表忠詞松雲影堂碑銘)」과 왜장 가토 기요마사의 진중을 정탐한 기록인 「진중탐정기(陣中探偵記)」,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찾아가 회담한 기록, 적을 토벌할 방책에 대한 상소(上疏), 선조의 전교(傳敎) 및 유정(劉綎)의 서첩 등이 수록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 공주시 계룡면의 표충원(表忠院) 등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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