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934
한자 鶴洞里觀察使功績碑群
영어공식명칭 Hakdongni Gwanchalsagongjeokbigun
이칭/별칭 학동리 관찰사공적비군,관찰사공적비,학동리,정건조,이호준,이병문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1219-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수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64년연표보기 - 학동리 관찰사공적비군 관찰사 정건조 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76년연표보기 - 학동리 관찰사공적비군 관찰사 이호준 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82년연표보기 - 학동리 관찰사공적비군 관찰사 이병문 비 건립
현 소재지 학동리 관찰사공적비군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1219-2 지도보기
성격 비|공적비군
양식 석비
관련 인물 정건조|이호준|이병문
재질 석재
크기(높이, 너비, 두께) 132.5㎝[관찰사 정건조 비 높이]|50㎝[관찰사 정건조 비 너비]|22㎝[관찰사 정건조 비 두께]|133㎝[관찰사 이호준 비 높이]|51㎝[관찰사 이호준 비 너비]|19㎝[관찰사 이호준 비 두께]|128㎝[관찰사 이병문 비 높이]|50㎝[관찰사 이병문 비 너비]|19.5㎝[관찰사 이병문 비 두께]
소유자 해남군
관리자 해남군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충무사 입구에 있는 조선 후기 관찰사 정건조, 이호준, 이병문의 선정과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3기의 비.

[개설]

학동리 관찰사공적비군(鶴洞里觀察使功績碑群)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충무사 입구에 있다. 조선 후기 관찰사(觀察使) 정건조(鄭健朝), 이호준(李鎬俊), 이병문(李秉文)의 선정과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관찰사는 조선시대 각 도에 파견되어 지방 통치의 책임을 맡았던 최고의 지방 장관으로 감사(監司)·도백(道伯)·방백(方伯)·외헌(外憲)·도선생(道先生)·영문선생(營門先生) 등으로도 불리었다. 관찰사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외관(外官)의 규찰이라는 관찰사 고유의 기능이다. 즉, 국왕의 특명을 받은 사신으로서 끊임없이 도내를 순력하면서 1년에 두 차례 수령을 비롯한 모든 외관에 대한 성적을 평가, 보고하는 일이었다. 둘째는 지방 장관의 기능으로, 모든 외관의 상급 기관으로, 도내의 모든 군사와 민사를 지휘, 통제하였고, 독자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상당한 정도의 직단권(直斷權)이 주어졌다. 따라서 각 도의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를 겸임하였다.

[건립 경위]

학동리 관찰사공적비군은 정건조, 이호준, 이병문이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베푼 공로를 기려 1864년, 1876년, 1882년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건립 주체는 알 수 없다.

[위치]

학동리 관찰사공적비군은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1219-2충무사 앞에 있다.

[형태]

학동리 관찰사공적비군은 건립 시기로 정리하면 관찰사 정건조 비는 좌대 위에 비몸을 세웠으며, 비의 몸과 머리가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비의 재질은 돌이며, 크기는 높이 132.5㎝, 너비 50㎝, 두께 22㎝이다. 관찰사 이호준 비는 좌대 위에 비몸을 세웠으며, 비의 몸과 머리가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비의 재질은 돌이며, 크기는 높이 133㎝, 너비 51㎝, 두께 19㎝이다. 관찰사 이병문 비는 좌대 위에 비몸을 세웠으며, 비의 몸과 머리가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비의 재질은 돌이며, 크기는 높이 128㎝, 너비 50㎝, 두께 19.5㎝이다.

[금석문]

학동리 관찰사공적비군은 건립 시기로 정리하면 관찰사 정건조[재임 기간 1863~1865] 비는 앞면 가운데에 ‘관찰사정공건조영세불망비(觀察使鄭公健朝永世不忘碑)’라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뒷면의 음각문을 해석하면, “나는 관내문적에 자재에서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면서 해남에 우거하였는데 선대의 유업을 아주 심하게 떨어뜨린 것을 원통하게 한하노라. 해남 서면 청룡동 보적산 아래 동북 방향에 무덤이 있은 즉 부모의 신체가 묻힌 곳이다. 터는 본래 옛날의 공부방인데, 기해년[1839]에 구입하여 우수영 진무청의 서류를 등록하여 소연하게 하였다. 그런데 정사년[1857]에 본영에서 주출하여 조세를 거둘 계획을 하려고 재실과 가까이하게 하였다. 이곳이 과거에 기와를 굽던 곳인데 장대를 세워 개와를 이었는데, 가격을 50냥으로 징수하도록 위협하였다. 그 후 본영에서 징수를 원망하는 소리를 듣고 즉시 50냥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 흘러 사람에 마음에 깊게 새겼지만 가히 헤아리기는 어려웠다. 정사년[1857] 10월에 다시 드러나게 되었던 까닭에 암행어사 성공(成彛鎬)은 별도로 엄정하게 제하여 입지를 바르게 세웠다. 그리하여 갑자년[1864] 8월에 다시는 묘실 근처에서 기와를 굽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 돈을 징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연함에 순상[관찰사]께서 관내에 제하여 바르게 돌아가도록 하였다. 장차 이 의미를 돌에 새기고자 하여 기와를 굽지 못하도록 하고 간접적으로 관계되는 사람에게 책임을 추궁할 입지를 엄정한 문서로 하달하였다. 전후 입안한 서류는 해와 별처럼 빛났으나, 애석하게도 백성들의 정이 영원한데, 뒷날의 큰 은혜를 갚지를 못하고 돌아가시니 감히 잊지를 못하는구나. 이를 돌에 새기어 기록하고 후세에 전하여 부신을 삼도록 하며, 뒷날 이 비문을 열람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송덕의 근본을 알도록 하고자 한다. 일편의 불후한 비문이 오래도록 천추에 길이 남도록 그대들에게 이르노라. 갑자년[1864] 10월에 창령 조석창(曹錫昌)이 삼가 기록하다.”라고 새겨져 있다.

관찰사 이호준[재임 기간 1870~1874] 비는 앞면 가운데에 ‘관찰사이공호준영덕불망비(觀察使李公鎬俊永德不忘碑)’라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광서이년 오월 일(光緖二年 五月 日)’이라는 연기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광서 2년은 1876년(고종 13)이므로 1876년 5월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관찰사 이병문[재임 기간 1880~1882] 비는 앞면 가운데에 ‘관찰사이공병문송덕불망비(觀察使李公秉文頌德不忘碑)’라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임오 오월 일(壬午 五月 日)’이라는 연기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재임 기간을 고려해 보면 임오년은 1882년(고종 19)으로 보인다.

[현황]

학동리 관찰사공적비군해남 충무사가 2018년 문내면 동외리로 옮겨 가면서 문내면 학동리 1219-2충무사 입구에 있다. 2018년 말 비석의 보존 처리를 마친 후 동외리 신 충무사 인근으로 옮겨 보호할 예정이다.

[의의와 평가]

학동리 관찰사공적비군은 조선 후기 관찰사공적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로 평가된다. 관찰사 정건조, 이호준의 공적비는 인근 완도군 소안도와 신안군 신의도에도 세워져 있어 비교해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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