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920
한자 琴城祠
영어공식명칭 Geumseongsa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금풍리 34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희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이전 시기/일시 1920년 - 금성사 이전
현 소재지 금성사 -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금풍리 34 지도보기
원소재지 금성사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백야리 오천마을 지도보기
성격 사우
양식 목조와가
정면 칸수 3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창녕성씨 종중
관리자 창녕성씨 종중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금풍리 명금마을에 있는 창녕성씨 사우.

[개설]

금성사(琴城祠)는 성여완, 성석용, 성개, 성희, 성삼문, 성담수 6위를 배향하는 창녕성씨 사우로 원래 해남읍 백야리 오천마을에 건립하였다. 정확한 건립 연대는 확인이 어렵다. 1920년 현재 위치로 옮겨 배향하고 있다.

성여완(成汝完)[1309~1397]은 고려 말기의 충신이다. 호는 이헌(怡軒) 시호는 문정(文靖), 별칭은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1336년(충숙왕 5)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검열, 해주목사, 민부상서, 정당문학상의를 지냈다. 1392년 정몽주가 살해되자 국운이 기울어졌음을 알고 포천 왕방산에서 은거하였다. 성여완의 아들 성석용(成石瑢)[1352~1403]은 문신으로 대사헌·예문각대제학을 지냈다. 성석용의 아들 성개(成槪)[?~1440]는 관찰사를 지냈다. 성희(成熺)는 성개의 아들로 문신으로 『세종실록』과 『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성삼문(成三問)[1418~1456]은 집현전에서 학사, 수찬 등을 지내며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여 절의와 함께 공로가 높이 평가되는 인물이다.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하여 조선 왕조의 대표적인 절신으로 평가받는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성담수(成聃壽)[?~1456]는 성희의 아들이며 세조 때 생육신 중 한 사람이다.

[위치]

금성사해남군 화산면 금풍리 명금마을회관에서 서쪽으로 100m 거리 마을 안쪽 산자락에 있다.

[변천]

금성사는 원래 해남읍 백야리 오천마을에 건립하였다고 전하나 정확한 건립 연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근대기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 현재 위치인 화산면 금풍리로 옮겨 배향하고 있다.

[형태]

금성사는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이고, 지붕은 맞배지붕집이다. 다듬은 원형 주춧돌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와를 올린 담장으로 둘렀으며 강당에는 금성원기[오준선 글, 1927] 등 현판이 있다. 금성사 앞에는 금성사봉안선세사적비가 있다.

[현황]

금성사는 창녕성씨 종중에서 매년 향사를 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금성사는 해남 세거 씨족인 창녕성씨의 선현 추숭과 해남 향촌 사회사를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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