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633
한자 鄭運
영어공식명칭 Jeong Un
이칭/별칭 창진(昌辰),충장(忠壯)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정윤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43년연표보기 - 정운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70년 - 정운 무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91년 - 정운 녹도만호 부임
몰년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정운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81년 - 정운충신각(鄭運忠臣閣) 건립
출생지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지도보기
묘소|단소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평활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충절사 -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 지도보기
성격 무신
성별
본관 하동(河東)
대표 관직 제주판관|녹도만호

[정의]

조선 전기 해남 출신의 무신.

[개설]

정운(鄭運)[1543~1592]은 한산도대첩 등 임진왜란의 숱한 해전에서 이순신(李舜臣)의 선봉장으로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부산포해전에서 전사하였다.

[가계]

정운의 본관은 하동(河東)이며 자는 창진(昌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훈련원참군을 지낸 정응정(鄭應禎)의 아들이다.

[활동 사항]

정운은 1543년(중종 38)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에서 태어났다. 1570년(선조 3)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봉사·금갑도수군권관(金甲島水軍權管)·거산찰방(居山察訪)·웅천현감을 거쳐 제주판관을 역임하였다. 성격이 강직하여 제주목사와의 불화로 파직되었다가 1591년 전라좌수영 관할의 오관오포 중 하나인 흥양현 녹도진[현 고흥군 녹동]을 지키는 녹도만호에 임명되었다.

1592년 4월(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도망치고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이순신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부분의 장수들이 방어에 집중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지만 정운은 군관 송희립(宋希立)과 함께 결사적으로 출전을 주장하였다. 이후 정운은 옥포·웅천·합포해전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였으며, 6월 4일 당항포해전에서는 적의 대장선에 뛰어들어 적장의 목을 베고 불을 지르는 큰 전과를 올렸다.

정운은 7월 8일 한산도대첩에서 큰 전과를 올리고 9월 1일 부산포해전에서 참가하여 선봉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정운의 전사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나의 오른팔을 잃었다.”라고 통곡하며 손수 장례식을 준비하고 영결식 축문을 직접 지어 죽음을 애도하였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

1866년 정운의 8대손 정희(鄭熺)가 2권 2책의 『정충장공실기(鄭忠壯公實記)』를 간행하였다.

[묘소]

정운의 묘소는 해남군 삼산면 평활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정운은 1604년 병조참판, 1796년(정조 20) 병조판서 겸 의금부훈련원사로 추증되었으며, 1681년(숙종 7)에 정운의 공을 기리기 위해 정운 충신각(鄭運忠臣閣)을 세웠다. 정운 충신각은 1985년 2월 15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의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정운은 녹도만호로 있던 고흥군 도양읍의 쌍충사(雙忠祠), 순천시 해룡면의 충무사(忠武祠)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정운이 순절한 부산 다대포 몰운대에 정운공순의비(鄭運公殉義碑)가 세워져 있으며, 매년 10월이 되면 향사를 거행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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