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492
한자 門內孝子曹錫昌感應碑閣
영어공식명칭 Munnae Filial Son Choseokchang Gameungbigak
이칭/별칭 해남 학동리 조석창 효자각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충무길 21-13[학동리 1128]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희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63년연표보기 - 문내 효자 조석창 감응비각 건립
보수|복원 시기/일시 1912년 - 문내 효자 조석창 감응비각 중건
문화재 지정 일시 2011년 07월 06일연표보기 - 문내 효자 조석창 감응비각 해남군 향토문화유산 제21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76년 - 문내 효자 조석창 감응비각 정건조가 비문을 짓고 시효비 건립
현 소재지 문내 효자 조석창 감응비각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충무길 21-13[학동리 1128]지도보기
원소재지 문내 효자 조석창 감응비각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충무길 21-13[학동리 1128]
성격 효자 감응비|비각
양식 석비|목조와가
관련 인물 조석창
재질 석재|목조
크기(높이, 너비, 두께) 170㎝[효자 감응비 높이]|64㎝[효자 감응비 너비]
소유자 창녕조씨 종중
관리자 창녕조씨 종중
문화재 지정 번호 해남군 향토문화유산 제21호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충무마을에 있는 조선 후기 조석창의 효자 감응비와 비각.

[개설]

석남(石南) 조석창(曺錫昌)은 부모 생전에 효성이 지극하였을 뿐 아니라 부모가 죽은 뒤 백발이 성한 몸으로 묘 앞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조석창은 증조할아버지의 비석이 운반 도중 바다에 빠지자 밤낮으로 하늘에 빌었다고 한다. 빌기를 한달 여 만에 꿈속에서 기인이 나타나 비석을 찾아주었고 이로써 증조할아버지의 묘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조석창의 이야기는 당시 조정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에 감화받은 철종이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고 부역과 조세를 면해 주었으며 1863년(철종 14) 효자 감응비를 세웠다. 1876년(고종 13) 정건조(鄭健朝)가 비문을 지어 시효비(施孝碑)를 세웠다.

[건립 경위]

조석창의 효행 사실이 널리 알려져 예조에서 정려를 내리자 1863년 효자 감응비를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다.

[위치]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충무마을회관을 돌아 작은 길을 따라가면 언덕에 문내 효자 조석창 감응비각과 재실이 있다. 문내 효자 조석창 감응비각해남 학동리 조석창 효자각이라고도 한다.

[형태]

문내 효자 조석창 감응비는 비좌 위에 비몸을 세우고 한옥 지붕 형태의 비 머리를 올렸다. 효자 감응비는 높이 170㎝이고, 너비 64㎝이다. 감응비각은 정면과 측면 각 1칸이다. 시효비는 비좌 위에 비몸을 세우고 한옥 지붕 형태의 비 머리를 올렸다.

[금석문]

효자 감응비 제명은 ‘유명조선효자조군석남감응비명병서(有明朝鮮孝子曺君石南感應碑銘并序)’이며 40행 26자의 비문이 새겨 있다. 내용은 1863년(철종 14) 4월 18일 특별한 교지로 부역과 세금을 감면하는 대우를 하고 장려하는 은전을 내린 사실, 돈독한 행실과 부모상에 여막을 짓고 살아 있을 때처럼 예를 다한 점, 증조할아버지 비석을 물길로 옮기다 풍랑으로 빠졌는데 간절히 기도하자 꿈에 신인이 비석 위치를 말해 주어 찾았다는 점, 선비들이 예조에 포상을 청하자 비석이 나온 곳에 비석과 누각을 건립하고 효자 감응비라 한 사실, 그리고 선조의 세계(世系)와 명문(銘文) 따위이다. 지명은 감토동(甘土洞) 상봉리(上峯里)이다.

시효비 제명은 ‘진사초수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조석창시효기지비(進士超授通政大夫僉知中樞府使曺錫昌施孝紀思之碑)’이며 33행 22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정건조가 지었다. 내용은 1863년 4월 지극한 행실로 부모를 섬겼기에 호남 선비들이 포상을 청하자 은전을 베풀어 효자비를 건립한 사실, 1866년(고종 3) 경기 지역에 서양의 경고가 있자 전라우수사 진영에 나아가 막을 계책을 의논한 사실, 1873년 향시에 응시하여 진사에 올랐는데 나이 80세가 넘어 정삼품 겸오위장에 임명하는 포상이 있었던 점, 그리고 선조의 세계와 명문, 연대와 지은이를 적고 있다.

[현황]

효자 정려각은 정면과 측면 각 1칸의 팔각지붕 건물로 삼문과 담장으로 둘려져 있다. 정려각 안에는 효자 감응비 1기와 판하예조입안(判下教禮曹立案)[1863], 예조판서·전라도관찰사·해남현감의 관문(關文)[1863] 따위를 판각한 현판 4개가 있다. 비각 앞에는 정건조(鄭健朝)가 비문을 지은 시효비가 있다. 옆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감시재(感時齋)가 있다. 건물 안에는 조석창의 자계서(自戒序), 입선비후유감(立先碑後有感)[조석창, 1863], 송조군석남귀반석서(送曺君石南歸磐石序)[1863, 이경노(李景魯)] 등 5개의 현판이 있다. 1912년 중건되었으며 기와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의의와 평가]

문내 효자 조석창 감응비각은 조선 후기 효자 정려비와 비각으로 당시 제도사와 향촌 사회사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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