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480
한자 新安里石佛立像-石塔
영어공식명칭 Sinanri Stone Buddha Figurine and Stone Pagoda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탑과 부도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신안리 산52
시대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황호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2015년 06월 29일연표보기 - 신안리 석불입상 및 석탑 해남군 향토문화유산 제24호 지정
현 소재지 신안리 석불입상 및 석탑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신안리 산52 지도보기
성격 석불입상|석탑
재질
크기(높이) 170㎝[석불 잔존 높이]|92㎝[석불 전체 너비]|170㎝[불상 잔존 높이]|54㎝[불상 어깨 너비]|122㎝[석탑 1층 옥개석 너비]|46㎝[석탑 1층 옥개석 높이]|112㎝[석탑 2층 옥개석 너비]|32㎝[석탑 2층 옥개석 높이]|94㎝[석탑 3층 옥개석 너비]|32㎝[석탑 3층 옥개석 높이]|83㎝[석탑 4층 옥개석 너비]|30㎝[석탑 4층 옥개석 높이]
관리자 해남군
문화재 지정 번호 해남군 향토문화유산 제24호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신안리에 있는 고려시대 건립된 석불입상 및 석탑.

[개설]

신안리 석불입상 및 석탑(新安里石佛立像-石塔)해남군 해남읍 신안리에 있다. 고려시대 건립된 석불입상 및 석탑으로 2015년 6월 29일 해남군 향토문화유산 제24호로 지정되었다.

[건립 경위]

신안리 석불입상 및 석탑 중 석불입상은 고려 중기 무렵 조성되었고, 신안리 석탑은 고려 전기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위치]

신안리 석불입상 및 석탑은 해남군의 남서쪽에 있는 덕음산 중턱에 있다. 신안저수지와 신안리를 지나서 동쪽으로 난 마을길을 따라 덕음산 아래까지 진입하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두 갈래 길에서 왼쪽[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200m 정도 들어가면 미륵암[기도 도량]이 인법당 안에 모셔져 있고, 석탑은 건물 향우측에 옥개석만 있다.

[형태]

신안리 석불입상 및 석탑 중 석조여래입상은 광배와 불상을 한 돌에 조각하였고 대좌에 끼우고 시멘트를 발랐다. 석불은 여러 군데가 파손되었다. 두광 상단 일부, 눈·코·귀를 중심으로 한 상호 일부와 왼손 엄지손가락이 파손되었는데 넘어지면서 훼손된 것으로 여겨진다. 상호는 윤곽만 나타날 뿐 여러 군데가 파손되어서인지 두 눈과 코를 시멘트로 발라 놓았다. 입술 부분은 쪼아져 있고 두 귀 역시 귓불이 떨어져 나가고 윤곽만 남아 있다. 이마의 한가운데에는 백호공이 뚜렷하고 머리는 소발이며 정수리에는 육계가 솟아 있다. 목은 가슴 쪽으로 내려오는 삼도를 표현하였다. 법의는 통견으로 오른쪽 어깨를 걸쳐 뒤로 넘겨서 왼 어깨를 둘러 가슴에서 다시 묶는 모습이다. 오른쪽 어깨 부분은 완만하게 굽은 선으로 흘러내렸지만 왼쪽 어깨에서는 곧은 선을 그었다. 가슴에 겹쳐 입은 내의가 표현되어 있다. 배 아래로는 ∪자형 옷자락이 무릎 아래까지 늘어뜨렸다. 손은 왼손만 표현하였고 오른손은 보이지 않는다. 왼손은 엄지를 구부려 얼굴 쪽으로 치켜세우고, 새끼손가락은 펴서 가슴 앞에 대고 있다. 나머지 세 손가락은 안으로 구부렸다. 오른손은 속옷 속에 넣은 상태여서 정확히 단언할 수 없으나 오른쪽 무릎 측면의 너비로 보아 오른쪽 무릎 옆으로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법의 끝자락에 띠 매듭과 삼각형 모양의 장식물을 달았다. 대좌는 거의 네모에 가까운 타원형으로 복련이 표현되었다. 두광은 상호를 중심에 놓고 원형의 음각선으로 둘렀다. 광배 전체에 불꽃무늬를 새겼다. 두광 윗부분은 왼쪽을 기준으로 45도 비스듬히 절반 정도 파괴되었다. 불상 표면과 광배, 측면 및 뒷면은 잘 다듬었다. 세부적인 표현 수법과 대좌에 표현된 연꽃 등으로 미루어 고려 중기 무렵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불의 크기는 잔존 높이 170㎝, 전체 너비 92㎝, 불상 잔존 높이 170㎝, 어깨 너비 54㎝이다.

석탑은 건물 향우측에 옥개석만 포개져 있고 주변에 돌담을 둘렀다. 30여 년 전 주변에 흩어져 있던 석탑 옥개석을 한데 모아 쌓아 놓았다고 한다. 석탑 옥개석은 4매가 남아 있으며 크기에 맞춰 포개 놓았다. 옥개석은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한 편이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끝에 가서는 살짝 위로 들린다. 옥개석 아랫면에는 빗물이 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깥으로 흘러내려 가도록 하는 층급받침을 두었고, 상면에는 탑신 굄을 표현하여 놓았다. 층급받침은 아래에서부터 5단, 5단, 4단, 3단씩이며, 탑신 굄은 모두 1단씩이다. 날렵하지는 못하지만 옥개석 4면 모서리가 약간 들리는 느낌은 남아 있다. 석탑은 최상부에 놓인 옥개석에서 찰주공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볼 때 오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 옥개석의 크기는 1층은 너비 122㎝, 높이 46㎝이고, 2층은 너비 112㎝, 높이 32㎝이고, 3층은 너비 94㎝, 높이 32㎝, 4층은 너비 83㎝, 높이 30㎝이다.

[현황]

신안리 석불입상은 예전에는 미륵당[미륵사], 지금은 미륵암[기도 도량]의 인법당 안에 모셔져 있고, 석탑은 건물 향우측인 같은 지대에 옥개석이 놓여 있다. 2015년 6월 29일에 해남군 향토문화유산 제24호로 지정되었으며, 해남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절터로 추정되는 곳은 미륵암과 요사채가 건립된 평탄지 일원이다. 미륵암은 1987년에 미륵당으로 건립되었다. 미륵암에서 동쪽으로 약 5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2007년에 건립한 산신각 1동이 있다. 미륵당에서 산신각으로 오르는 길 중간에는 건물의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평탄지 1곳이 있으며 물과 관련된 방형 시설이 1곳 있다. 미륵암 주변에는 크게 2단의 평탄지와 석축이 남아 있으나 1987년에 미륵당을 건립하면서 새로 조성한 것이다. 절터의 범위는 기와 조각이 보이는 상·하단 평탄지로 추정되고, 문화재의 규모로 볼 때 평탄지 남쪽 대나무 군락이나 계곡부 아래 경작지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절터 운영 시기는 석조여래입상과 석탑 옥개석, 기와 조각 등으로 추정해 볼 때 고려 전기 무렵에 창건되어 조선 중기 이후에 폐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신안리 석불입상 및 석탑은 절터에 보존되어 온 신앙의 대상물로서 석불은 고려 중기 무렵, 석탑은 고려 전기 무렵에 조성된 양식적인 특징을 보여 주며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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