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지방 민립대학 설립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406
한자 海南地方民立大學設立運動
영어공식명칭 The Private College Foundation Movement in Haenam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성환·이성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2년연표보기 - 해남 지방 민립대학 설립 운동 민립대학기성회 해남지방부 조직
종결 시기/일시 1924년연표보기 - 해남 지방 민립대학 설립 운동 민립대학기성회 해남지방부 해체
성격 교육운동
관련 인물/단체 윤정현|강현선|이윤용|박종오|윤주홍|노광현|강서욱|양재진|김진모|김상우|김낙천|이종목|김상우|김사명

[정의]

일제강점기 해남 지역에서 전개된 교육문화운동.

[개설]

민립대학 설립 운동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뒤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자, 이상재(李商在)·한규설(韓圭卨)·윤치소(尹致昭) 등 100여 명의 민족주의자들이 민족교육과 민족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민립대학을 설립하려고 시작한 운동이다. 구제척인 실천을 위한 조선민립대학기성회의 창립과 더불어 전라남도 해남 지역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지방부가 조직되었다.

[역사적 배경]

민립대학 설립 운동이 처음 일어난 것은 한말이었다. 윤치호(尹致昊)·남궁억(南宮檍)·박은식(朴殷植)·양기탁(梁起鐸) 등이 600만 원을 모금하여 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19년 3·1운동 이후 다시 시도되었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문화통치를 선포하면서 동화(同化)하려는 기본방침을 세우고, 일선무차별교육을 내세운 교육령 개정을 서둘렀다. 한편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은 물산장려운동과 함께 민족교육을 위한 교육운동을 강조했다. 1920년 6월 23일 이상재·한규설·윤치소 등 100여 명의 발기로 ‘조선교육회’가 출범했다. 일제는 1922년 2월 모든 교육정책의 입안과 운영, 전문학교 및 대학 등 설립 자격은 총독부에서 관장한다는 조선교육령을 발표했다. 이에 조선교육회는 내선공학(内鮮共學)을 내세운 관립 제국대학 설립에 맞서 민립대학의 설립을 결의했다.

[경과]

1922년 11월 23일 서울 남대문 식도원에서 민립대학기성준비회 개최를 계기로 본격적인 민립대학 설립 운동에 들어갔다. 1922년 12월부터는 각 지방에서 발기인을 선정하여 이를 중앙에 통보하는 등 급속하게 진척되었다. 1923년 3월 29일 전국 170여 군에서 1,000여 명에 달하는 발기인이 모인 가운데 민립대학기성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민립대학기성회 지방부가 1923년 5월 10일 경성지방부 발기회를 시작으로 조직되었다. 그리고 민립대학기성회 중앙부는 이승훈(李昇薰)·조만식(曺晩植) 등 13명을 지방순회위원으로 삼고 ‘한민족 1,000만이 한 사람 1원씩’의 구호를 내걸고 전국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민립대학기성회 지방부는 전남·평북·황해도 등에 많이 조직되었는데, 주요 구성원은 재산가·지방유지·군수·면장·청년단체 임원 등이었다. 민립대학기성회 지방부는 각 군에 설치하였고, 군 지방부는 각 면에 지회를 두었다. 해남지방부의 정확한 조직 시기와 활동에 대해 자료가 없어서 알 수 없지만 『동아일보』 1923년 7월 27일자 「민대지방부 해남함양에 조직」 기록을 보면 1923년에 해남지방부가 조직되었다. 또한 해남지방부 임원은 위원장 윤정현(尹定鉉), 집행위원 13개 면장[강현선, 이윤용, 박종오, 윤주홍, 노광현, 강서욱, 양재진, 김진모, 김상우, 김낙천, 이종목, 김상우, 김사명] 등 총 197명으로 구성되었다.

[결과]

일제는 민립대학 설립 운동이 적극적으로 확산되자 탄압과 회유를 병행한 방해공작을 하였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일제는 집회를 허용하지 않았다. 또한 「조선교육령」 제12조에 따라 일인들만으로 대학창설준비위원회를 만들고, 1924년 5월 경성제국대학 관제를 공포하였다. 반면 민립대학설립기성회는 1923년 모금 목표를 400만 원으로 정하였으나 모금액은 100만 원도 되지 않았으며, ‘전조선청년당대회’에서는 1,000만 원으로 대학보다는 노동자들의 강습소와 농촌의 야학원 등의 설립을 주장하였다. 이 시기에 남부 지방의 한재와 북부 지방 홍수로 인해 모금이 지지부진하게 되면서 민립대학 설립 운동은 대학 설립 신청조차 하지 못하고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민립대학기성회 해남지방부는 대부분의 지방부와 다르게 지방순회위원회 활동에 자극을 받아 조직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조직되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1923년 이전 해남은 보통학교, 강습소, 야학원 등을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에 앞장섰던 지역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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