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산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362
한자 珍山縣
영어공식명칭 Jinsanhye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한정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할 지역 진산현 -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 지도보기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 일대에 설치되었던 조선 초기 지방 행정구역.

[개설]

고문헌에서 진산현(珍山縣)의 존재를 직접 확인할 수 없지만, 진산고성(珍山古城)의 존재와 산이면 일대의 죽산현·산이면·진산리 등의 지명을 통해 진산현의 존재를 역추적할 수 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태종 대 죽산현에서 진산현이 갈라져 나왔다. 죽산현 별개로 산이면 일대에 현 단위의 지방행정 단위가 설치될 정치적, 경제적 이유가 있었다.

[관련 기록]

“진산고성은 현의 서쪽 30리[약 11.78㎞]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터만 남아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7, 해남현 고적]

“진산성(珍山城)은 서쪽으로 20리[약 7.85㎞]에 있으며, 돌성의 자취가 남아 있다.”[『대동지지(大東地志)』 해남현 성지]

[내용]

진산은 본래 해남군의 속현이었다가 폐현된 곳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 확인되는 진산고성은 진산현성으로 추정되지만, 그 당시에도 성이 이미 훼철되어 터만 남았고, 현재에도 산이면 개발 사업으로 인해 확인할 길이 없다.

지명을 통하여 추정하여 보면, 조선 1409년(태종 9)에 죽산현(竹山縣)에서 진산현(珍山縣)이 갈라져 해진군(海珍郡)의 속현이 되었다. 하지만 1437년(세종 19)에 진도와 해남이 다시 분리되어 해남현(海南縣)을 다시 설치하자, 해남현에 예속되면서 산일면과 산이면으로 나뉘게 되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1757~1765년 편찬]에 따르면 구(舊) 진산현에 서산일면과 서산이면의 이름이 보인다. 서산일면의 서(西)는 해남현의 서쪽임을 뜻하는 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해남현 산이면뿐만 아니라 ‘진산’이라는 지명이 동진산(東珍山)과 함께 나타나고 있다. 산이면 진산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내송리, 대진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진산리가 되었다. 현재는 진산·산정 2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마을에는 진산고성지(珍山古城址)뿐만 아니라 청자가마터가 있어 고려시대에도 매우 번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9세기 후기의 고종 대에 편찬한 『해남군읍지』에 산포일도면(山浦一道面), 산포이도면(山浦二道面)이 확인되는데, 이때의 산이반도는 산포(山浦)가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산포는 진산포(珍山浦)의 약칭이며, 산이면의 ‘산’의 어원도 진산에서 유래되었다. 이것은 고대 이래 진산 중심의 산이반도가 이때에 양분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산이반도에서 진산대진에만 유달리 고인돌이 많이 분포하는 것도 고대에는 진산이 산이반도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변천]

조선 태종 대에 생성된 진산현이 세종 대에는 다시 해남현에 예속되어 산일면과 산이면이 되었다. 18세기 자료에 ‘진산’이라는 지명이 확인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산이면 진산리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진산현은 진산리 청자가마터 등과 관련하여 중세 시기 해남 지역 산이반도의 역사와 문화 복원을 위한 주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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