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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399
한자 東學農民運動
영어공식명칭 Donghak Peasant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최성환·김은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4년 3월연표보기 - 동학농민운동 봉기
종결 시기/일시 1894년 11월 - 동학농민운동 우금치 전투 패배로 실패
발단 시기/일시 1894년 1월 - 동학농민운동 고부 민란으로 발단
성격 농민운동
관련 인물/단체 송태섭(宋泰燮)|김춘두(金春斗)|김춘인(金春仁)|백장안(白長安)|전유희(全由禧)|김신영(金信營)|윤주헌(尹周憲)|김순오(金順五)|장극서(張克瑞)

[정의]

1894년 해남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

[개설]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고종 31) 1월 고부군에서 발생한 고부민란에서 비롯되었다. 고부민란 이후 전봉준과 김도삼(金道三)·정익서(鄭益瑞)·최경선(崔景善) 등이 3월 무장현에서 봉기하고 민중들의 봉기와 호응을 촉구하였다. 당시 농민군은 관군을 연달아 격파하고 4월 전주성을 점령한 후 전주화약(全州和約)을 체결한 후 자진 해산하였다. 전주화약을 계기로 농민군들은 자신들의 고을로 돌아가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새 정권을 수립하자 농민군들은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다시 봉기하였다. 농민군은 우금치전투에서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패하고 논산과 원평 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잇달아 패하였다. 이후 농민군은 모두 흩어지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지도자들도 체포되면서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역사적 배경]

19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안으로는 세도정치가 만연하고 조세제도 운영의 문란 등 극심한 혼란이 가중되었고, 밖으로는 서양세력의 침략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호남 지방의 농민들은 과도한 세금과 부패한 관료들에 수탈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몰락 양반이었던 최제우는 동학을 창시하였다. 사인여천(事人如天)이라는 평등사상을 교리로 하는 동학의 교세가 전국으로 급격히 확장되었고, 이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농민군을 결속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경과]

1894년 고창의 무장에서 일으킨 봉기인 ‘무장기포’ 당시 해남에서도 참여하였다. 전주화약 이후 농민군들이 각 고을로 돌아가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개혁을 실시하였다. 해남에서도 1894년 6~7월 사이 농민군들이 들어와 폐정개혁 활동을 펼친 것으로 보인다. 농민군의 제2차 봉기 당시 해남의 주요 농민군 지도자로는 송태섭(宋泰燮)을 중심으로 김춘두(金春斗), 김춘인(金春仁) 형제와 백장안(白長安), 모사(謨士) 전유희(全由禧), 남리역(南利驛)[현 황산면 남리리] 대접주 김신영(金信營), 삼촌면(三寸面) 접주 윤주헌(尹周憲), 이도면(梨道面) 접주 김순오(金順五), 현산면(縣山面) 접사(接司) 장극서(張克瑞) 등이 참여하였다. 특히 우수영 농민군들의 봉기가 활발하였다.

해남의 농민군들은 2차 봉기 이후 장흥부, 강진현 및 전라병영을 점령하기 위해 1894년 12월 초~12월 15일까지 장흥의 농민군과 연합하여 전투에 참가하였다. 12월 15일 남쪽으로 내려온 토벌군과 장흥 석대(石臺)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패하였고, 남은 농민군들은 자울재를 넘어 퇴각하였다. 이틀간 정비한 후 12월 17일 4,000~5,000명의 농민군이 장흥 옥산리(玉山里)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였다. 장흥 옥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농민군은 천관산에 숨기도 하고, 대구·칠량을 거쳐 다시 해남 쪽으로 들어왔다. 12월 18일 해남에 있던 농민군들과 합세하여 모사 전유희, 황산면 남리역 대접주 김신영을 중심으로 수천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해남읍 부근에 집결하여 지금의 해남군청 일대인 해남읍성을 점령하려고 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제일 먼저 해남에 들어온 관군은 강진에서 온 이규태의 통위영 부대였다. 해남에 들어온 통위영 부대는 2개 소대로 나뉘어 농민군과 접전을 벌였다. 관군의 공격으로 농민군은 후퇴하여 주변으로 흩어졌고, 해남의 농민군 지도자들은 결국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였다.

[결과]

1894년 12월 19일 새벽 교도대 병정 300명이 해남에 들어와 해남읍 부근에서 접전을 벌였으나 무기의 열세로 농민군 8~9명은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전유희와 김신영은 체포되었고, 농민군은 해산하였다. 관군은 농민군 지도자를 체포하기 위해 우수영과 진도까지 수색하여, 숨어 있던 농민군 지도자들은 하나하나 체포되었다. 불목리에서 백장안, 대구·칠량에서 이무주·남도균·윤세환 및 130여 명이 체포되었다.

1894년 12월 22일 해남군 이도면 접주 김순오, 교장 박익현·집강 이은좌, 별장 박사인, 교수 김하진과 진도군 손행권·김수종 등이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였다. 12월 28일에는 해남군 현산민들이 현산면에서 활동하였던 접사 장극사, 교수 이중호, 도집 임제환, 집강 최원규 등을 체포하였고, 12월 30일에는 백장안을 체포하였다.

해남에서 희생된 농민군은 250여 명으로 다른 고을에 비해 농민군의 희생이 많았다.

[의의와 평가]

1894년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힘을 합쳐 일으킨 농민운동으로 해남군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제국주의 세력의 개입으로 많은 희생자를 낳으며 실패하였지만 농민 항쟁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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