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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396
한자 海月樓
영어공식명칭 Heawolru Pavil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터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달량진길 36[남창리 390-3] 일대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변남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21년~1850년 - 해월루 건립
폐지 시기/일시 1963년 - 해월루 훼철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11년 - 해월루를 철거하고 인근에 민박용 기와집으로 복원
소재지 해월루 -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달량진길 36[남창리 390-3] 일대지도보기
성격 누정|객사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에 있었던 조선 후기 누정.

[개설]

해월루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에 있으며 조선 시대에 제주를 왕래하는 사객들이 바람을 기다리는 건물이다. 영암군에서는 사객을 뒷바라지하기 위하여 남창(南倉)과 6방을 설치하였다. 해월루는 1821~1850년 사이에 지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순조 때 개조되었다고 한다. 5칸 건물이었던 해월루는 1963년 훼철되었고, 일부 자재는 1칸의 민가 건립에 활용되었다. 2011년 건물을 철거하고 팔작지붕 민박용 기와집으로 복원하였다.

[변천]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기에 제주도 입출항 포구는 전라남도 나주 목포[현재의 나주 영산포 인근 택촌 마을]였다가 1433년 이후 영암[현재의 해남]의 남창(南倉)으로 이동되었다. 당시 제주도를 왕래하는 사객들이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 남창 마을의 해월루였다. 해월루가 있는 남창은 다른 이름으로 달량, 고달도, 달도, 이진으로도 불리었다. 제주를 왕래하는 사객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하여 영암군에서는 남창을 짓고, 바람을 기다리는 장소로 해월루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1821~1850년 사이에 해월루가 세워졌으며 순조 때 개조되었다고 한다. 이원조(李源祚)[1792~1872]는 1841년 제주목사가 되어 제주도에 들어갈 때 해월루를 이용하였다. 『정조실록』에 의하면, 1794년(정조 18) 12월 호남위유사(湖南慰諭使) 서영보(徐榮輔)가 별단을 올려 아뢰기를, “제주도 세 고을의 수령과 사신이 왕래할 적에 강진·해남·영암이 도회(都會)를 나누어 정해서 각각 1년씩 돌아가면서 거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신이 출입할 때에는 매양 영암의 고달도(古達島)에서 바람을 기다리기 때문에 영암의 경우는 이진창(梨津倉)에 6방을 설치하여 접대를 맡고 있습니다[濟州三邑守令及使客往來時 康津·海南·靈巖分定都會 各一年輪回擧行 而使客出入 每於靈巖 古達島候風 故靈巖則設置六房於梨津倉 以爲支供].”라고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誌)』에서도 “제주도로 가는 자는 여기서 배를 타며, 소안도(所安島)에서 바람을 기다린다[海月樓梨津南入濟者發船於此至所安島候風].”라고 하였으며, 1872년 『조선후기지방도』해월루가 그려져 있고 제주 왕래자의 후풍소 창고 고달도창[濟州入去使客候風所 倉舍 古達島倉]이 함께 기록되었다.

[위치]

해월루는 『대동지지』에 “해월루(海月樓)이진(梨津) 남쪽에 있다[海月樓梨津南].”라고 하였는데 현재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 동쪽 연안에 있다. 정확한 위치는 남창리 390-3번지 일대로 면적은 1,517㎡이다. 남창 창고는 창안이라 불리며 해월루 바로 뒤에 있다.

[현황]

해월루는 1960년 무렵 5칸이었으나 건물이 허물어지자 일부 자재가 민가 건립에 재활용되었다. 2000년대 계속 폐가로 방치되다가 2011년 면단위활성화사업의 하나로 건물을 철거하고 인근 부지에 민박용 기와집으로 건립하였다.

[의의와 평가]

해월루가 세워진 남창 마을은 조선 전기부터 제주를 왕래하던 사객들이 바람을 기다리던 유서 깊은 장소이다. 관에서는 인근에 남창과 육방을 설치하여 사객들을 뒷바라지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학술적인 조사를 통하여 복원할 가치가 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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