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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지원[나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288
한자 三枝院-
영어공식명칭 Samjiwon[Ferry Point]
이칭/별칭 옥동선착장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시대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변남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폐지 시기/일시 1984년연표보기 - 삼지원[나루] 진도대교 개통으로 나루 소멸
성격 나루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와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간을 왕래하였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나루.

[개설]

삼지원(三枝院) 나루는 진도와 해남 사이에 있는 명량해협의 동단을 가로지르는 나루이다. 해남 삼지원[나루]의 진도 쪽 상대 나루는 벽파진으로 고려 때에는 대진(大津)이라 칭하였다. 나룻가에 있는 원정(院亭)은 바람과 물때를 기다리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1984년 진도대교가 준공되자 삼지원의 나루 기능은 정지되었다.

[명칭 유래]

삼지원의 지명은 고려 때와 조선 시대가 다르고 한자 표기도 다양하며, 또 벽파진이라 기록되기도 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삼견원(三堅院), 조선시대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新增)』에서는 삼기원(三岐院),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삼지원(三枝院), 『해남읍지(海南邑誌)』는 삼지원(三支院)으로 표기하였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 의 해남현 조에서 “벽파진(碧波津)은 서쪽으로 60리[약 23.56㎞]에 있으며 진도로 통한다.”라고 하였다. 이로 보아 진도군 벽파진의 상대 나루이므로 해남 쪽에서도 삼지원벽파진이라 호칭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형성 및 변천]

삼지원 나루는 고려시대에도 있었다. 배와 바람을 기다리는 장소로 이용되었던 원정은 1872년 『조선후기지방도』로 보아 20세기 초까지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1970년대에는 차도선이 운항되다가 1984년 진도대교가 준공되자 삼지원의 나루 기능은 정지되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삼지원 나루는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 잡304-14의 남쪽에 있었다. 지금은 옥동선착장이라 불린다.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 의하면 “삼지원해남현 서쪽 60리에 있다.”라고 하였으나 『해남읍지』[1872]에서는 “현의 서쪽 40리[약 15.71㎞] 혹은 30리[약 11.78㎞]에 있다.”라고 하였다. 해남읍에서 직선으로 약 22㎞이므로 서쪽으로 60리가 옳다. 1872년 『조선후기지방도』를 보면 옥매산 아래에 삼지원이 그려져 있고 원정 그림과 60리[自官60里]로 표기되어 있다. 삼지원은 해남쪽에 있는 나루이며 벽파진은 상대 진도쪽 나루명이다.

『대동지지』 진도군 기록에서는 “고려에서는 대진(大津)이라 칭하였다. 해남현삼지원(三枝院)과 통하는 큰 길[뱃길]이며, 관리 책임자는 수진장(守津將)이 한 사람이며, 10리[약 3.93㎞] (서쪽) 우수영(右水營)으로 통한다.”라고 하였으며, 『해남읍지』[1872]에서는 “삼지원은 현의 서쪽 40리에 있다[三支院在縣西四十里創院宇卽碧波津頭也].” 그리고 “현의 서남은 모두 바다이다. 벽파진은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진도와 군계이다. 양안 사이 피차의 바닷길이 모두 30리이다. 나룻가에 원관이 있다. 나룻배가 끊이지 않고 중류에 송도, 승이도가 있는데, 혹 풍파를 만나면 이 섬들에 의지한다[海縣西南皆海 碧波津在縣南三十里 珍島郡界 兩岸之間彼此海程皆十里程 津頭有院官 船津船往來絡繹 中流有松島鼎島或值風彼不順依於此等島].”라고 하였다. 『고려사』에서는 1270년(원종 11) 11월에 “김방경(金方慶)[1212~1300]이 아해(阿海)와 함께 삼견원(三堅院)에 주둔해 진도를 마주보고 진을 쳤다[方慶與阿海, 屯三堅院, 對珍島而陣].”라고 하였다. 삼지원을 고려시대에는 삼견원이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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